봄가을 블로그

| 일상

도망친 곳이 낙원이기를 바라진 않는다

4년 8개월 동안 일했던 곳에서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직하는 이야기

어쩌다 이직을 하게 되었나

이전 회사의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광활한 정글 한가운데에서, 손에는 고작 낫 하나를 들고선, 어디가 북쪽이고 남쪽인지도 모른 채 희미하게 보이는 태양빛을 나침반삼아 매일매일 앞으로 힘겹게 헤쳐나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와중에 AI의 발전은 너무나 눈부셔서 날씨가 매일매일 극적으로 바뀌어버리니 영 정신이 없기도 하였습니다.

작년 중순에는 좀 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필요를 느꼈습니다. 이 회사에서 할 수 있는 걸 해보자는 방향성 아래 싸움을 걸어야겠다, 권력에 도전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순간 벽을 마주했고 이를 극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 만큼 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편, 가족을 위해 더 안정적이고 이름있는 회사를 들어가겠다는 계획은 사실 한참 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계획에는 방향성만 적혀있고 일정은 아직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살짝 부족한 내적 동기가 마감일 칸을 그냥 빈 칸으로 내버려둔 채 1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버렸죠. 누군가는 답답해했고 나에게 답을 요구했습니다. 나 또한 나에게 답을 요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서류라도 넣어보자, 면접 경험이라도 쌓아보자, 나의 시장 가치를 객관적으로 파악해보자 하여 올해 1월부터 여러 곳에 여러 지원을 넣었습니다. 한달에 3-4 개의 반차를 신청하면서 회사 바깥 사람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직의 여정

서류는 왜 붙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전 회사에서 4년 8개월 동안 근무했는데, 그 기간을 높게 쳐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력서는 자세히 보지 않고 GitHub와 블로그를 유심히 봤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비즈니스적인 관점을 눈여겨 보신 분도 있었습니다. 서류에 합격했을 때, 분명 떨어진 다른 이들과 나 사이에 차이가 있었을텐데 그게 무엇일까 추론하기는 아주 어려웠습니다. 원티드보단 리멤버가 더 응답률이 좋았다는 느낌은 있었네요.

면접도 영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머리가 하얘지면서 식은땀도 나고 빡셌다는 느낌이 드는 곳은 다 붙었습니다. 분위기가 괜찮고 이야기가 잘 풀리는 것 같고 대답을 술술 잘했다는 기분이 드는 곳은 모두 떨어졌습니다. 붙었던 곳은 힘겹게 대답했던 그 아슬아슬한 레벨을 떠올리며 보강해야겠다는 생각, 떨어진 곳은 면접관의 흥미가 어느 포인트에서 날라가버렸을지 상상해보곤 했습니다.

잘 대답하지 못한 질문이 기억에 남는 게 하나 있습니다. 왜 프론트를 선택했는가? 지금까지 한 일을 살펴보면 프론트 뿐만 아니라 백엔드나 인프라도 어느정도 공부해서 준비해볼 법도 합니다. 특히 몇몇 면접관들은 이력서를 보고 프론트가 아닌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백엔드보단 프론트를 좀 더 잘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흥미도 프론트 쪽이 더 있는 것 같습니다. 기술적인 관점에서는 별 차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둘다 현실의 문제를 기술적으로 추상화하여 해결해야 하는 과제임은 똑같습니다. 따라서 문제 해결 관점에서 프론트, 백엔드, 인프라 등등은 모두 값어치가 큽니다. 그런데 예술의 관점에서 보면 아키텍처에서 오는 아름다움보다는 비주얼적인 아름다움이 더 매력적이라고 느낍니다. 이는 개인적인 취향이라 면접에서 대답으로 바로 나올 수 있는 건 아니었어요. 저는 지도앱, 화려한 애니메이션, 인터렉션, 폰트 등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이 회사를 왜 선택하게 되었나? 이런 질문은 듣고 싶은 대답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거리를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다면, 나와 면접관 사이의 거리보다는 나와 맞춤형 대답 사이의 거리를 생각합시다. 일단 붙을 수 있을 때까지 붙은 다음 나의 거취를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흠, 전부 다 듣고 싶은 대답을 해주면 되지 않느냐? 그런데 모든 질문을 준비할 순 없습니다. 모든 걸 기억하고 회고할 수도 없습니다. 로봇처럼 꼼꼼하게 준비할 수도 있지만 현재진행형인 인생에서 이직 준비만 있는게 아니다보니 적절한 수준에서 스스로의 멘탈과 시간 관리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회사에 대한 조사는 면접보기 전 1-2시간 정도 찾아봅니다. “이 회사를 왜 선택하게 되었나”와 같은 예상 질문 준비도 1-2가지로 제한했습니다. 대답할 때 최선을 다하는 건 당연합니다. 추가로 아래 2가지 질문을 꼭 하는 것도 목표로 잡았습니다.

  • 왜 나를 선택했냐는 질문. 이력서(혹은 이전 면접)에서 제가 귀사와 어떤 부분에서 핏이 맞다고 판단을 하셨는지가 궁금합니다.
  • 그 회사에서 내가 인정받을 수 있는 분위기나 성과 지표가 마련이 되어 있는가, 내가 그 직무에서 나의 역량을 100% 발휘할 수 있는가 라는 관점에서의 질문 하나. 이건 나 자신을 잘 알아야 하는 문제이기도 해서 질문을 뽑아내기가 참 어렵습니다.

어떤 질문을 해야 할까라는 고민에 길잡이로서 도움을 많이 받았던 자료는 데이터홀릭이라는 채널의 두 YouTube 영상입니다. (본 채널이 좀 흥했으면 좋겠지만 그렇진 않아서 조금 슬픕니다. 좋은 자료가 많으니 관심있는 주제의 영상을 살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여기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직의 성공이 아닌 성공적인 이직을 추구해야 한다고 합니다. 나의 영향력을 크게 펼칠 수 있는 회사가 좋은 회사이다… 라는 것이지요.

사실 나와 맞는 조직을 잘 선택해야겠다는 필요를 지금은 크게 느끼지 않습니다. 군대를 떠올렸을 때 그렇게 답답하다는 기분이 들지도 않았습니다. 컬처핏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실 경험해본 조직의 종류가 별로 없어서 어떤 조직을 들어가든 새로운 도전이라는 이름 아래 모두 합리화가 가능했습니다.

군대를 떠올려봅니다. 군대는 굉장히 보수적이며 “군대식” 처리라는 말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어휘가 된 만큼 뒤틀려있는 결정을 자주 하는 집단입니다. 그런데 이해 못할 건 없었습니다. 군대도 결국 사람이 사는 동네입니다. 규칙이 왜 그렇게 타이트한지 정확한 히스토리는 모르겠지만, 사소한 문제라도 아주 극혐을 하는 조직문화이고 사고 발생 가능성 자체를 없애버린다는 기조 때문에 뒤틀려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런 데서도 저는 잘 살았습니다. 그 통제 속에서도 나름의 자유를 만끽했습니다. 예를 들면 애들 근무표 짤 때 한셀을 이용하여 각 근무시간대별/위치별로 고생 가중치를 둔 다음 점수가 낮은 사람들을 먼저 편성하는 식으로 진행했죠.

나는 어떤 사람일까

4년 넘게 웹 쇼핑몰 사장님들을 위한 마케팅 B2B SaaS 프로덕트를 설계하고 개발하고 운영했습니다. 프론트, 백엔드, 인프라를 깔짝댔고 심지어 CS도 겁나게 했습니다. CS의 신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봤는데, 막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자신감을 가져도 되는 포인트인가요? 제가 다른 직군과의 커뮤니케이션 경험이 많은 건 아니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 여쭤보신 면접관이 계셨는데요, 고객 응대를 많이 했다고 하니까 뭔가 인정해버리는 느낌이긴 했습니다. 누군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고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가 장점일까요? 그런데 난 면접관들이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잘 모르겠단 말입니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서 쩔쩔맸던 경험들이 떠오릅니다.

비즈니스를 자주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사고방식은 익숙하지만, 비즈니스를 성공시킨 경험은 없기 때문에 나의 고민과 판단은 설득력을 갖기 어려웠습니다. 기술적인 챌린지도 뒤로 밀렸습니다. 프론트와 백엔드 둘다 깊이는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높게 평가된 건 커뮤니케이션 능력인 것 같긴 합니다.

커뮤니케이션의 신이 있다면 또 어떤 모습일까? 저와는 좀 다를 것 같습니다. 저에겐 카리스마나 매력이 좀 떨어집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설득시킬 요량은 없습니다. 대표라는 직함이 저와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중재는 좀 잘할 수도? 새로운 회사에서는 플랫폼 팀으로 들어가긴 하는데요, 플랫폼 팀이 그런 역할을 가진 팀인지 어떨지…는 사실 전혀 감이 없답니다.

도망친 곳이 낙원이기를 바라진 않는다

베르세르크라는 만화에 명언이 하나 있습니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이전 회사 리더 한분과 술자리를 했었는데요, 그분이 아쉬운 마음에 저 명대사를 인용하며 거기가 얼마나 좋은 데인지 두고 보자- 라는 느낌으로 농담을 쳤습니다. 나중에 저는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하는 건 도망일까? 도망 맞지. 그런데 좀 더 탈출에 가까운 느낌인 거 같기도 하고, 복합적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족을 위한 계획은 끝나기는 커녕 이제 시작입니다.

상관 없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도망이 유일한 선택지일 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나, 엄마는 엄마라는 책에서 얻은 통찰은, 맞서 싸우는 게 해답이 아닐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있는 힘껏 회피하면서, 물리적 거리를 만들어내면서, 시간을 흘려버리도록 하는 게 그냥 해결책일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좀 충격이었습니다.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이었어요. 저는 운명을 정복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는데 이 책 때문에 조금 사그라든 것 같기도 합니다. 맞서 싸운다는 생각 보다는, 할 수 있는 걸 하자는 생각이 더 강해진 것 같습니다.

NEW 회사의 첫 출근이 이틀 뒤 입니다. 첫 이직이기도 하고 그래서 긴장이 되어 잠도 제대로 못자고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봅니다. 들어간 팀에서는 어떤 상사와 단 둘이 일을 해야 하는 상황. 그런데 그 상사는 진짜 미친놈이고 가학적이어서 나를 볼때마다 괴롭히고(밤낮, 주말 상관없이), 성과를 인정해주지 않고, 기회란 기회는 다 박탈시켜버리며, 기억력이 안좋아서 자기가 나에게 시킨 일을 기억도 못합니다. 심지어 나를 뺀 모든 타팀 사람들에게는 착하고 능력있는 이미지이고, 사장과는 개인적 친분이 있으며, 더군다나 인사팀과도 한통속인, 사이코패스. 음… 이런 상황보단 낫지 않을까요?

낙원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딱. 걱정 반 기대 반. 어떻게 될진 아무도 모르겠습니다. 뭐 잘 되겠지요-